오늘(1일) 밤 10시30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지상 최대 규모의 구출작전 '푸른눈의 선장과 김치 – 기적의 해상철수작전'이 방송된다.

 

 

지난 1950년 추운 겨울 어느 날. 함경남도 흥남에 사는 6살 인재네 가족은 이불과 먹거리를 보따리에 대충 쓸어 담고 급하게 집을 나선다. 영문도 모른 채 길을 떠나게 된 인재는 곧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쫓기듯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행렬의 정체는 피란민들이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흥남 부두.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철수를 결정한 군인 10만여 명에 피란민 20만여 명까지 더해져 흥남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앞은 시퍼런 바다가, 뒤는 코앞까지 추격해온 중공군이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피란민들은 인파 속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육로로 철수하지 못하고 흥남을 통해 해로로 철수해야 했던 이유는 철수 당시 함흥-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이 중공군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으며 12월 9일에 중공군이 원산까지 점령하면서 퇴로가 끊겼기 때문이다. 즉, 배로 철수하는 것 빼고는 함경도 등지에 위치한 병력과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갈 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유엔군 사령부는 해상 철수가 이루어지는 흥남항 부두를 중심으로 A구역부터 F구역까지 방어선을 설정하고, 동해에 위치한 미 해군의 함포 사격의 도움을 받으며 유엔군과 한국군은 철수를 준비한다.

 

 

한편 급한 연락을 받고 흥남항에 입항하는 배가 한 척 있었다. 폭 19m, 길이 138m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이 배의 정원은 단 60명이었다. 누군가에겐 마지막 기회가 될 승선이 시작되는데 최대한 많은 인원을 태우기 위해 선장과 선원들이 생각해 낸 묘수는 과연 무엇일까? 당시 선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벌리 스미스 씨에게 생생한 그날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피난민을 데려가는 것을 꺼렸다. 피난민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데다 병력과 장비, 물자를 싣는 데만도 수송선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피난민 사이에 스파이가 침투하여 파괴 공작을 하게 되면 큰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 한국군 지휘관들은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며 극렬 반발했다.

여기에 미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통역이었던 20살의 현봉학, 해군 군수 참모로 상륙을 담당하는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중간에 매개체가 되어 알몬드 장군을 끈질기게 설득하니 마침내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난민을 태우기로 동의를 받는다. 그 결과 약 10만 명의 피난민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피난을 올 수 있었다.

식량과 물, 심지어 화장실도 없는 극악의 상황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가 시작된다. 그러던 중 배 안에서 새 생명이 무려 다섯 명이나 태어났다. 마침 그날은 12월 25일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들에게 미국인 선원들은 김치 1,2,3,4,5호라는 이름 붙인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건조된 지 5년 정도 된 7,600t급 빅토리급 수송선으로, 철수 직전 가장 마지막에 남은 상선들 중 하나였다. 이 배는 일본을 출발할 때 항공유를 잔뜩 싣고 왔는데, 흥남에 짐을 내릴 수 없자 부산으로 갔다가 배가 부족한 바람에 짐을 덜 내린 채 12월 21일에 다시 흥남으로 온 상태였다.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화물이 무엇인지를 안 다른 배들은 절대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김치 키즈들은 그 후로 어떤 삶을 살았을지, 흥남에서 거제도까지 온 수많은 피란민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지 흥남철수작전으로 내려온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꼬꼬무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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